2024년 2월 9일. 1년간의 직장을 불가피한 이유로 나오게 된 뒤 2025년 2월 11일. 일을 그만둔 채 1년의 세월이 지났다. 당시가 생생히 떠오르는데 나는 그때 벌어둔 돈으로 비전프로를 구매하고, 여러 압박감에서 벗어난 자유의 몸으로 다음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설레는 마음으로 미래를 계획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긴 시간을 의미있게 활용하지 못했다. 계획했던 운동이나 언어 공부를 하거나, 개발 관련한 프로젝트들은 제대로 내보지도 못한 채 여러 무의미한 나태함 끝에 지금에 도달하게 되었다.

작년 10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재기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곤 했지만 구직 활동에도, 내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 삶에도 반동이 크게 남아, 앞으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장 지금, 이력서를 다시 작성하는 데 있어서 몇 주를 소모할 만큼 고행으로 여기고 있다. 이전에는 즐겁게 나에 대한 수식어들, 자랑스러운 결과물들, 내가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가치들을 정리하고 써내려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내가 활자속 표현된 나와 같다고, 나를 표현하고 있다고 당당히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유로 어째서 나는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 지, 어째서 추락하였고 다시 올라설 수 있을지 회고해보고자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새학기에 자기소개를 하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벌벌 떨 정도로 이런 방면에서 기질이 유약했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거나 인지하는 능력 자체가 서툴러서 주변에서 타인에 의한 부정적인 경험을 겪으면 쉽게 스트레스 받곤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런 스스로에게 큰 불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남과 다른 특이성에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내 개인적인 유년기는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나는 일상적으로 공상에 빠져있는 걸 좋아했는데, 수업시간의 대부분은 상상 속에 푹 빠져지냈다. 이런 성격의 나는 외적으로 적당한 페르소나를 세워두고, 그 뒷면 속에서 가족과 일부 몇몇 친구들을 포함시킨 나의 세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주로 지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며 익숙했던 집에서 떠나며 그간의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년간은 수많은 친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나 싶었지만, 사회의 한 인격으로서 언젠간 해결해야했을, 미뤄둔 숙제들이 속속히 도착했다. 거미줄같이 엉킨 복잡한 인간관계, 줄어드는 나만의 시간, 경쟁의식, 열등감, 피해의식, 불편한 관계와의 조율. 속수무책으로 나는 찢겨졌고 내 외적 정체성을 보수하고 손보는 것에 버거워진 나는 시야를 내부로 돌렸다. 내 개인적인 생각들과 바람들은 더더욱 안으로만 돌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고, 휴학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주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마주했지만, 가까운 관계이더라도 나는 속시원하게 내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나의 생각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주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마치 일에 질려버린 공무원이 민원을 응대하듯 적당한 말을 골라서 삭막이 답해버리고 말았다. 일부러 매정하게 대했다기보다는, 외적인 정체성에 관심을 두지 못한 지 너무 오래 지나버려 최근에 본 영화는 뭐가 있었는지, 요즘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같은 간단한 질문에도 어떻게 답해야하고 어떻게 대화를 끌어나가야할 지 아예 잊어버린 탓이었다.

대신 그동안 앱을 만들거나, 3D, 디자인 툴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보는 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었다. 시간을 들여 가꾼 내 안을 어색하고 어려운 대화 대신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편했고, 이 길을 통해 나를 내가 원하는 꿈의 궤적으로 올려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동안 가짜 가면이었던 나의 외면을, 이미 부서진 그 외면을 벗어던지고 내 내면이 겉으로 들어나 외내면이 합일이 된, 진정한 스스로를 보여주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기대는 애플 개발자 아카데미로 향했다. 중학교 1학년 개발자를 꿈꾼 뒤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소. 변할 수 있는 장소로서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포항에 내려간 첫날부터 그 생각은 개박살이 났다. 눈을 쳐다보는 것도, 나에게 오는 호의도, 나에게 묻는 질문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내 깊은 속에서 잊고있던 내 기질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에서도 어중간한 답습이 계속 되었다. 이곳에선 수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친해질 수 있었다. 분명히 더 가까이 내 모습을 보여주어도 받아주었을 사람들인데, 그깟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려움은 더 크고 무거운 무게를 지닌 직장생활에서 해결될 리 만무했다. 면접 때 내가 이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내 능력들과 가치관들, 기술적인 질문에 대한 답, 개발에 대한 내 철학을 말하는 것에는 거침없었지만, 취업 이후 동료가 묻는 시시콜콜한 취미 이야기, 서너명이서 커피를 마시며 오가는 티키타카 대화들 사이에서는 나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현재으로 돌아와 나는 나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자괴감과 어려움이 생겼다. 내가 생각해온 나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질 수많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리고 기대했음에도 나는 증명하지 못했고 나를 기대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나를 소개해야하는 이력서에 나를 적어가지만, 그것이 실제 내가 맞을 지 의심에 가깝게 적어나가는 일은 고문과도 같았다. 합일의 주체는 내가 고대한 내면으로부터가 아니라 부서진 외면으로부터, 그것이 서서히 나를 짓눌러가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이력서를 작성하는데만 있지 않다. 나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여러가지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나, 현재 앱스토어에 출시된 앱은 하나뿐이다. 이 모순적인 상황은 완성도에 대한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어릴적 나는 소중히 여기는 여러 상상들과 생각을 표현할 방법으로 여러 방식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예술적 재능은 훌륭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그중에서 미적 감각은 탁월하게 형편없었는데 이는 윈도우나 피쳐폰 화면을 보는 것이 즐거워 UI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싶어서 모든 메뉴를 껐다켰다 해보던 복선. 친구가 가져온 아이팟 터치를 체험해보며 받은 충격으로 테크기술을 활용해서 나를 표현하겠다고 마음먹고 꿈을 정하게 될 때 UI디자이너와 개발자 사이 갈림길에서 개발자를 택하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다.

다만, 앱을 만들고, 블렌더나 피그마를 재미로 배워보는 과정속에서 개인적으로 디자인을 접할 기회들을 많았고, 자신감을 얻어 디자이너로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명함, 간판이나 메뉴판을 포함한 브랜딩을 해줘야할 기회도 꽤 있었고, 평가도 좋았던 지라 꽤 자존감이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좋은 경험이었지만 일부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제시한 안이 나은 것 같음에도 불필요한 수정사항을 요구받다 한참을 돌아 엉망이 된 뒤에 다시 초안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꽤나 있었다. 개인적으로 예술이면 모르겠지만, 기능적인 면을 고려해야하는 디자인에서는 어느정도 절대적인 좋고 나쁨의 정도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사실 내 스스로에 대한 동질적 혐오감이 맞을 것이다. 마음 한 편엔 항상 내 스스로 잘하고 있는 지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질 않았다. 더군다나 앱 개발의 경우, 나 혼자서 디자인하고 기획하고 개발한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지 내 스스로밖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내 눈에 좋게 보일지라도 사실 엉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잘 개발하고서도 엎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로 개발력보다는 디자인이나 기획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일 새벽까지 몰입해 완성한 디자인은 내일 아침 자고 일어나보면 끔찍하게 형편없어보이는 경험은 절망적이다. 완성도에 대한 의심은 기획면에도 전염되서 내가 분명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라고 흥분된 채 만들었을텐데 얼마 뒤에는 새삼 이런 쓰레기가 다 있지 싶을 때도 있다.

핀터레스트 같은 사이트에서 레퍼런스 작업물을 보고 이런걸 어떻게 만드는 건지 마법같이 여겼던, 그래서 만들어보고 싶던 욕구는 기술적인 학습으로 채택되었다. 점차 배움이 늘면서 기술적인 면에서 부족해서 제품을 만드는데 실패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완성도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져간다. 보는 눈은 높아졌고, 그걸 보고 따라 만들 수는 있겠으나 온전한 내 것을 만드는건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일이 여러번 반복되니 스스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다가도 의심이 든다. 이런 부족한 아이디어를 누가 쓰기나 할까? 좀 더 완성도 있는 기획으로 만들었어야하는게 아닐까? 이런 형편없는 완성도의 디자인은 내보낼 수 없는게 아닌가? 그래서 결국 세상에 내보이는 제품은 만들어왔던 것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 조차되지 못했다. 나머지는 코드뭉치가 되어 깃헙과 피그마 한 구석 어딘가에 방치되길 반복한다.

그리고 이런일들이 반복되니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도 잘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괴감이 든다. 어차피 엎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만드는 행위도 즐겁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지금 흥분되는 무언가도 나중에 와선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 보이니까

사실 나는 기껏해야 경력 1년의 개발자고 디자인도 커리어 측면에서 보았을 때 취미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 프로젝트로서 당연히 잘 짜여진 성공한 전문적인, 대형 프로젝트들과 비교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좋을텐데 나는 오히려 내 개인에 대한 나약함에 짖눌려버렸다.

일개 한 명의 사람, 개인으로서 보다 거시적인 영역에 있어서 압박을 받는 분야가 몇몇 더 있다. 아카데미 활동 도중 후반에 최종 프로젝트와 외부 공모전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압박감에 시달렸다. 팀에서 나는 개발과 디자인을 모두 맡고 있었고, 내 스스로 원하고, 자처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서 조율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정해진 시간 제한이 있었고 진행이 불만족스럽더라도 어느정도 타협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앞서 말했듯 부족한 완성도를 용납하기 힘들었고, 그 때 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공황이 가끔씩 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가 끝난 이후에는 일상생활 시 시야 초점이 안맞거나 장 활동도 망가지는 등 여러가지로 증상이 더 늘어버렸다. 당시의 나는 얼마 안가 죽을거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지금 와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꽤나 진지하게 믿고 있어서 죽음이후의 내가 남기고 갈 유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정리하는데 시간을 쏟기도 했다.

이런 건강문제에 혼이 팔려 몸 이곳저곳 증상마다 큰 병은 아닐까 강박에 빠져 큰 거금을 들여 내시경을 하거나 건강검진을 맡거나 하는 일들이 늘었다. 사실 어릴때부터 원인불명의 심장통증 등의 증상이 있던 것도 한몫했다. 죽으면 내가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개연성없게 의미없이 끝나버리는 것 같아서. 그런게 허망함이 찾아오더라도 내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이 싫었다.

내 귀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전쟁과 불안한 정치적인 상황들도 문제였다. 사실 그런 일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 앞을 조심하지도 못할 망정 지금 고민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들을 떠올리곤 했다. 당장 전쟁이 나서 동원된다던가, 국내 정세가 불안해져 취업자체가 너무 힘들어지고 내 커리어가 쭉 망가지는 게 아닌가. 이런 불안함을 이기기 위해 뉴스나 정세를 알아보고 또 다시 불안감을 얻고 악효과의 반복이었다.

이런 나는 기대함을 포기함에 이르렀다. 내가 취직에 성공했을 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이 입사가 취소되거나 나중에 해고당하게 된다면 그 기쁨의 배가 되어 통증으로 다가올까봐 지레 겁먹고 미리 대비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겨울날,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전달받게 되었을 때 슬픔없이 담담할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는다. 내 개인이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문제라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지도 모른다면, 그냥 맡겨 누워버리는게 편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는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나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 대해 저평가하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나를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형편없이 보일 무언가를 내놓고,

아무의미없이 거인의 발걸음에 밟혀 사그라들 행위일지언정

나는 움직여야한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앞에 와있다. 가족을 위해. 내 건강을 위해. 자금의 안전성을 위해. 철학적인 면도 생각할 필요가 있고 중요하지만 당장 해결해야할 것들이 차갑고 무자비하게 다가오고 있다. 내가 무너져서 힘든건 견딜 수 있을지라도 나로 인해 가족이 힘들어하는 건 결코 볼 수 없다. 다양한 문제로 걱정만 하면서 실제로는 무방비하게 걱정이 실현되는 곳으로 끌려나가는 것을 그대로 볼 수만은 없다.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제 다시 근원적으로, 새로이 움직여야 함을 느낀다. 직관적으로 당장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더 내가 바라던 것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딘가 다시금 나아갈 힘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회고하면서 생각을 훑어가며 부정적인 것보다 더 기쁜, 좋았던 기억들을 많이 꺼낼 수 있었다. 나는 내 표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 룸메이트가 왜 나의 지메일 배경사진은 지우개냐고 물었을 때 나는 또 다시 굳어버렸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상으로 주신, 지우개에 나는 눈코입을 그리고 인격을 부여했었다. 주변 친구들은 받자마자 낙서하냐고 말했지만, 그건 나에게 있어 역으로 소중하다는 상징이었으니까. 무언가를 지우기 위한 만들어진 물건을 나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데 사용한 그런 모순적인 면이 나다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이 내가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창조로서, 개발자로서의 생각이라는 뜻을. 당연히 싸늘하거나 어디 모자란 애를 바라보는 듯한, 애매하게 넘어가려는 분위기를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 그는 내게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기억으로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개발할 때 나는 자운대에서 살았을 때 평온한 마을 풍경과, 마을을 걸어다니면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아이들 소리와 정겨운 티비소리, 그리고 언덕 뒤 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등이 듣기 좋아서 나만의 추억의 장소에서 배경음을 녹음하고 이를 들을 수 있는 플레이어를 개발중이었다. 평소같았다면 개발하다 이런걸 누가 쓸 지 의미없음을 느껴 중간에 던져버렸겠다만 주변에서 내 작업을 보고 넌지시 던진 말이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누군가는 너와 닮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겠지"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힘이 되는 말이었다.

내게 무겁게 짊어진 완성도에 대한 압박감도 내려놓아보자. 최종 프로젝트에서 공황까지 올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던 상황속에서 나는 수없이 디자인을 엎고 또 엎었다. 그중엔 팀원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것 조차 자괴감이 들어 어디 구석에 던져놓은 컨셉 페이지도 있었다. 얼마전 핀터레스트를 들어가 예전 계정을 훑어보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누군가 내 핀을 저장했다는 알림이 처음보는 큰 숫자만큼 쌓여있음과, 그 핀이 내가 기억도 못한채 업로드되어 있었던 그 컨셉페이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유일한 앱 기린도 마찬가지다. 본인조차 사용할 일이 없는 아이들의 키를 기록하고 AR을 활용해 키재기를 보여주고, 추억을 벽이라는 물리적인 장치를 대신해 저장한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고, 그 가치를 어느순간 나 조차도 믿지 않았다. 허나 홍보도 하지 않은 앱이 3천명 이상의 다운로드를 받았고 누군가는 내가 믿었던 가치를 이 앱에서 기대하고 얻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만드는 것들의 대부분이 처음엔 형편없을 수도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럴 수록 더더욱 많이 내보이고, 많은 피드백을 구해야 한다. 취미 중 하나인 이스포츠 경기를 보며, 얻었던 교훈 중에 하나는 공격적이게 시도하는 쪽이 결국은 결실을 얻는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수비적으로 임하는데 편하고 나아보일지라도 시즌의 끝에 가선 우여곡절을 겪었던, 아픔을 겪었던, 형편없음을 꾸준히 트라이하던 팀들이 우승하게 된다. 내가 내는 글이나 작품 모두가 완성도가 형편없어 비난 받을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더더욱 내보여야 할 증거라고 느끼고 있다.

내 스스로의 무력감도 치우고 다시 일어나보자. 미리 무너져놓았다고 그래서 덜 아프다고, 실제로 넘어짐을 당해보니 이 방법이 더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근 몇년중에 내가 가장 마음 아팠던 기억은 다른 일들보다 직장을 처음 구하고 상경할 때 부모님께 더 따뜻이 대해주지 못했던 점이다. 올라가는 나에게 별로 입지도 않을 양복을 사주시고, 쇼핑을 하며 들뜬, 독립시키는 아들에게 주는 감정들을 나는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간 만약 잘못되어 직장을 나오게 되어 이전으로 회귀하게 되었을 때, 내가 느끼는 아픔이 나를 죽음으로 가져갈 때 다가올 반동을 스스로가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았단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았을까? 지금 내가 잘못되었다고 그 선택이 맞았다고 느껴지나? 내가 만약 불가항력으로 죽게 되더라도 그게 맞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 기억은 몇 되지 않아 각인되버린 후회되는 일이다.

왜냐면 나는 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헛될지라도 웃으며 그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선택들에 대해서 왜 표현하지 못했을까. 왜 그냥 내가 만든 걸 부족해도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음에도 공유하지 못했을까. 나는 어째서 일어나지도 않은 슬픔을 염려해 눈앞에 있는 행복을 잡지 않았을까. 결국 그래왔고 계속 그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얻은 건. 못하더라도 안한 것보단 낫다는 것이다. 이건 27년의 경험이 담긴 교훈의 명제다. 그러니까 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부족하더라도, 하기싫더라도, 의미가 없게 될지언정 발을 앞으로 내딛자.